기획서 한 장은 남이 아니라 나를 위한 문서입니다
기획서라고 하면 공모전 응모나 출판사 투고용 서류를 먼저 떠올리기 쉽습니다. 물론 그런 용도로도 쓰입니다. 하지만 연재 작가에게 기획서가 가장 쓸모 있는 순간은 따로 있습니다. 40화쯤 써 놓고 "내가 원래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지?" 싶어질 때입니다.
연재는 몇 달, 길면 몇 년을 이어 가는 작업입니다. 그 사이에 댓글 반응이 들어오고, 새 인물이 생각보다 인기를 끌고, 처음 계획에 없던 사건이 끼어듭니다. 이런 변화는 나쁜 게 아닙니다. 다만 기준점이 없으면 변화가 쌓이다가 작품이 원래 무엇이었는지 흐려집니다. 기획서 한 장은 그 기준점입니다.
이 글에서 말하는 기획서는 딱 네 칸입니다.
- 로그라인: 이 이야기를 한 문장으로
- 시놉시스: 처음과 끝 사이에 주인공이 어떻게 바뀌는지
- 독자와의 약속: 매 화 독자가 받아 갈 재미가 무엇인지
- 목표 분량과 완결 조건: 몇 화쯤에서, 무엇이 해결되면 끝나는지
세계관 설정이나 인물 시트는 이 한 장 밖에 따로 둡니다. 인물을 만드는 법은 인물 설정 시트 만드는 법에서 다뤘고, 세계의 규칙은 세계관 규칙 정하는 법에서 따로 다룹니다. 기획서에는 그 내용의 결론만 들어가면 됩니다.
로그라인에 들어가야 할 네 가지
로그라인은 작품 소개 문구와 다릅니다. 소개 문구는 독자를 끌어들이려고 일부러 정보를 감추지만, 로그라인은 작가 자신이 이야기의 뼈대를 확인하려고 쓰는 문장입니다. 그래서 감추지 말고 핵심을 다 드러내야 합니다.
한 문장 안에 다음 네 가지가 있으면 쓸 만한 로그라인입니다.
- 누가, 어떤 처지에 있는가: 이름보다 처지가 중요합니다. "궁녀"보다 "독을 맛보는 일로 겨우 목숨을 부지하는 궁녀"가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.
- 무엇을 해야 하는가: 주인공이 이 작품 내내 쫓을 목표입니다.
- 무엇이 막는가, 혹은 무엇을 걸어야 하는가: 방해물이나 대가가 없으면 목표는 그냥 할 일 목록입니다.
- 이 작품만의 비틀기: 같은 장르의 수많은 작품과 갈리는 지점입니다.
네 번째가 가장 어렵고, 가장 자주 빠집니다. 회귀, 빙의, 계약 결혼 같은 설정 자체는 비틀기가 아닙니다. 그 설정 안에서 이 주인공에게만 생기는 문제가 비틀기입니다.
예시: 로그라인을 세 번 고쳐 쓰기
설명만으로는 감이 잘 오지 않으니, 이 글을 위해 만든 가상의 궁중 로맨스판타지 「기미상궁 서하연」으로 실제로 고쳐 보겠습니다.
초안
궁에서 일하는 소녀가 황궁의 음모에 휘말리며 성장하고 사랑을 찾는 이야기.
이 문장은 거의 모든 궁중물에 들어맞습니다. 주인공의 처지도, 목표도, 막는 것도 없습니다. "성장하고 사랑을 찾는다"는 결과일 뿐 이야기가 굴러가는 힘이 아닙니다.
1차 수정: 처지와 목표를 넣는다
황제의 음식을 먼저 맛보는 기미 궁녀 서하연이 연이은 독살 미수 사건의 범인을 찾아야 한다.
나아졌습니다. 이제 무엇을 하는 이야기인지 보입니다. 하지만 왜 하필 하연이 범인을 찾아야 하는지, 실패하면 무엇을 잃는지가 없습니다. 이대로라면 추리 과제일 뿐입니다.
2차 수정: 막는 것과 대가를 넣는다
황제의 음식을 먼저 맛보는 기미 궁녀 서하연은 독살 미수의 누명을 벗으려면 열흘 안에 진범을 찾아야 하지만, 단서를 쥔 사람은 그녀를 가장 먼저 의심한 황태자다.
이제 긴장이 생겼습니다. 기한이 있고, 도와줄 사람이 곧 적입니다. 로맨스의 축도 자연스럽게 들어왔습니다. 그래도 아직 "누명 쓴 주인공과 냉정한 황족"이라는 익숙한 그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.
3차 수정: 이 작품만의 비틀기를 넣는다
독을 맛만 보고도 이름과 출처를 알아맞히는 기미 궁녀 서하연은 독살 미수의 누명을 벗으려 진범을 쫓지만, 맛볼수록 그 독이 자신의 고향 마을에서만 쓰던 약초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드러난다.
이 문장에서 비틀기는 두 겹입니다. 주인공의 재능(독을 맛으로 감별)이 곧 수사 수단이고, 수사가 진행될수록 주인공 자신의 과거가 용의선상에 오릅니다. 범인을 찾을수록 주인공이 위험해지는 구조라서, 회차마다 진전과 위기가 동시에 생깁니다.
여기서 중요한 건 3차 수정본이 2차보다 길어졌다는 점이 아닙니다. 각 수정에서 질문 하나에 답했다는 점입니다. 1차는 "무엇을 하나?", 2차는 "왜 어려운가?", 3차는 "왜 이 작품이어야 하나?"에 답했습니다. 막힐 때는 세 질문 중 어디서 막혔는지 확인하면 됩니다.
시놉시스는 줄거리가 아니라 변화의 기록입니다
시놉시스를 쓰라고 하면 사건을 순서대로 늘어놓는 경우가 많습니다. "하연이 독을 맛본다. 쓰러진다. 의심받는다. 감옥에 간다..." 이렇게 쓰면 길이는 금방 차지만, 정작 이 이야기가 어디로 가는지는 보이지 않습니다.
연재용 시놉시스는 사건보다 주인공의 상태가 바뀌는 지점을 중심으로 씁니다. 다섯 문단 정도면 충분합니다.
- 시작 상태: 주인공이 처음에 무엇을 믿고, 무엇을 피하고 있는가
- 돌이킬 수 없는 선택: 이야기에 발을 들이게 되는 결정
- 목표의 의미가 바뀌는 지점: 처음 원하던 것이 다른 것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곳
- 가장 낮은 지점: 주인공이 가진 것을 거의 다 잃는 곳
- 끝 상태: 처음과 비교해 무엇이 달라졌는가
각 지점을 몇 화에 둘지는 목표 화 수로 전개 속도 정하기에서 자세히 다뤘으니, 시놉시스 단계에서는 순서와 내용만 정하면 됩니다. 「기미상궁 서하연」으로 채우면 이렇습니다.
시작 상태. 하연은 고향 마을이 역병으로 사라진 뒤 궁에 팔려 왔다. 독을 맛으로 알아보는 재주 덕분에 기미 궁녀가 되었고, "궁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오래 산다"는 말을 신조로 삼는다.
돌이킬 수 없는 선택. 황제의 탕약에서 독을 감별한 날, 하연은 독의 이름을 말하면 자기가 의심받을 걸 알면서도 이름을 댄다. 모른 척하는 대신 아는 것을 말하는 쪽을 고른 것이다.
목표의 의미가 바뀌는 지점. 독의 원료가 고향 약초라는 게 밝혀지면서, 하연의 목표는 "누명 벗기"에서 "고향 마을이 정말 역병으로 사라졌는지 알아내기"로 바뀐다.
가장 낮은 지점. 진실에 다가갈수록 고향을 없앤 명령이 선황 시절 황실에서 나왔다는 단서가 나온다. 하연을 믿기 시작한 황태자는 그 명령을 내린 사람의 아들이다. 하연은 황태자와의 협력을 스스로 끊는다.
끝 상태. 하연은 진실을 공개할지 묻어 둘지 선택할 권한을 쥔다. "모르는 사람이 오래 산다"던 하연이, 알고도 사는 법을 고른다.
다섯 문단을 나란히 놓으면 첫 문단의 신조가 마지막 문단에서 뒤집힌다는 게 보입니다. 시놉시스를 다 쓰고 나서 첫 문단과 마지막 문단만 따로 읽어 보세요. 둘이 거의 같은 사람처럼 보인다면, 사건은 많아도 변화가 없는 시놉시스입니다.
독자와의 약속: 매 화 받아 갈 재미
여기까지는 일반 소설 기획에도 쓰이는 내용입니다. 연재 기획서에는 한 칸이 더 필요합니다. 독자가 매 화 무엇을 기대하고 클릭하는가.
장편 소설 독자는 결말까지 가는 큰 흐름을 믿고 읽지만, 연재 독자는 한 화 한 화 계속 결정을 내립니다. 다음 화를 볼지 말지를 매번 고릅니다. 그래서 큰 줄거리와 별개로, 화마다 반복해서 주는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. 이걸 기획서에 미리 적어 두는 게 '약속' 칸입니다.
약속은 막연한 장르 이름이 아니라 반복되는 장면의 형태로 적습니다.
- 약한 약속: "궁중 암투와 로맨스"
- 쓸 만한 약속: "매 사건마다 하연이 음식이나 약을 맛보고, 남들이 못 본 단서를 맛으로 찾아낸다. 그때마다 황태자는 하연을 조금 더 믿고, 독자는 하연의 고향에 대해 한 조각씩 더 안다."
쓸 만한 약속에는 세 겹이 들어 있습니다. 반복되는 쾌감(맛으로 단서 찾기), 조금씩 움직이는 관계(황태자의 신뢰), 조금씩 풀리는 큰 질문(고향의 진실). 셋 중 하나라도 매 화 조금씩 움직이면 독자는 다음 화를 누를 이유가 생깁니다.
약속 칸을 적어 두면 연재 중에 "이번 화가 약속을 지켰나?"를 점검할 수 있습니다. 이 점검은 생각보다 자주 쓸모가 있습니다. 중반에 새 인물이나 새 무대를 들여오다 보면, 서너 화 동안 하연이 아무것도 맛보지 않는 구간이 생기기 쉽습니다. 그 구간에서 독자 반응이 식는다면 원인은 대개 약속이 끊긴 데 있습니다. 1화에서 이 약속을 어떻게 처음 보여 줄지는 웹소설 1화 쓰는 법을 참고하세요.
약속은 연재 중에 바꿀 수도 있습니다. 다만 바꿀 때는 예고 없이 갈아타지 말고, 기존 약속을 한두 화 겹쳐서 이어 가다가 새 약속으로 넘어가는 편이 독자를 덜 잃습니다.
목표 분량과 완결 조건
마지막 칸은 숫자 하나와 문장 하나입니다. 몇 화쯤 쓸 생각인지, 그리고 무엇이 해결되면 이 이야기가 끝나는지.
목표 분량은 정확할 필요가 없습니다. 80화인지 300화인지 정도만 정해도, 한 사건에 몇 화를 써도 되는지 감이 잡힙니다. 연재처나 공모전에 따라 분량 기준이 따로 있을 수 있으니, 그런 조건은 해당 플랫폼이나 공모전의 현재 안내를 직접 확인하세요.
완결 조건은 분량보다 더 중요합니다. 연재가 길어지면서 끝을 못 내는 작품은 대개 숫자가 아니라 조건이 없어서 그렇습니다. 「기미상궁 서하연」의 완결 조건은 "고향 마을이 사라진 진짜 이유가 밝혀지고, 하연이 그 진실을 어떻게 할지 스스로 정한다"입니다. 황태자와의 관계가 어떻게 끝날지는 이 조건에 묶여 따라옵니다. 조건이 분명하면 연재 도중 인기 있는 곁가지가 생겨도, 그 곁가지가 조건과 이어지는지 아닌지로 비중을 정할 수 있습니다.
완성된 기획서 한 장
지금까지 정한 내용을 한 장에 모으면 이렇게 됩니다.
| 칸 | 내용 |
|---|---|
| 제목(가제) | 기미상궁 서하연 |
| 장르 | 궁중 로맨스판타지, 추리 요소 |
| 로그라인 | 독을 맛만 보고도 이름과 출처를 알아맞히는 기미 궁녀 서하연은 독살 미수의 누명을 벗으려 진범을 쫓지만, 맛볼수록 그 독이 자신의 고향 마을에서만 쓰던 약초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|
| 시작 상태 | "모르는 사람이 오래 산다"를 믿는 궁녀 |
| 돌이킬 수 없는 선택 | 의심받을 걸 알면서 독의 이름을 말한다 |
| 목표 전환 | 누명 벗기 → 고향이 사라진 이유 알기 |
| 가장 낮은 지점 | 황실이 고향을 없앴다는 단서, 황태자와 결별 |
| 끝 상태 | 진실을 알고도 사는 법을 스스로 고른다 |
| 독자와의 약속 | 매 사건 맛으로 단서 찾기 / 황태자의 신뢰가 한 칸씩 / 고향의 진실 한 조각씩 |
| 목표 분량 | 120화 안팎 (1부 40화에서 목표 전환) |
| 완결 조건 | 고향이 사라진 진짜 이유가 밝혀지고, 하연이 그 진실의 처리를 스스로 정한다 |
이 표가 A4 한 장을 넘으면 너무 많이 적은 것입니다. 세부 설정과 인물 이야기는 각자의 문서로 보내고, 이 장에는 결정된 것만 남기세요.
기획서로 스스로 점검하는 질문
기획서를 다 채웠다면, 쓰기 시작하기 전에 다음 질문을 한 번씩 던져 보세요.
- 로그라인에서 1화 장면이 떠오르는가? 로그라인을 읽고 첫 장면이 그려지지 않는다면 처지가 아직 추상적입니다.
- 로그라인의 비틀기가 시놉시스의 목표 전환과 이어지는가? 「서하연」에서는 "독이 고향 약초"라는 비틀기가 곧 목표 전환의 계기입니다. 둘이 따로 논다면 로그라인이 작품의 진짜 중심을 못 짚고 있는 것입니다.
- 약속이 50화 뒤에도 유효한가? 초반에만 성립하는 약속(예: "주인공이 정체를 숨기는 재미")이라면, 정체가 드러난 뒤 무엇으로 이어 갈지 함께 적어 두어야 합니다.
- 완결 조건만 보고 마지막 화를 상상할 수 있는가? 상상이 안 된다면 조건이 아직 감정이나 분위기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.
이 네 질문에 막히는 칸이 있다면, 그 칸이 바로 지금 고칠 곳입니다. 연재를 시작한 뒤에 고치는 것보다 지금 한 장 안에서 고치는 편이 훨씬 싸게 먹힙니다.
Novel Studio에서 적용하기
Novel Studio에서는 작품 설정에 세계관, 규칙, 인물을 적고 목표 회차 수와 초반·중반·결말 비율을 정할 수 있어서, 기획서의 분량 칸과 시놉시스의 전환점을 그대로 옮길 수 있습니다. 회차 플롯 계획 단계에서 각 화가 '독자와의 약속' 중 무엇을 움직이는지 함께 적어 두면, 장면별로 AI 초안을 받아 고칠 때도 기준이 흔들리지 않습니다. 회차를 마칠 때 남는 요약과 미해결 떡밥, 훅 기록을 기획서의 완결 조건과 가끔 나란히 놓고 보면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확인하기 쉽습니다.